첫날부터 비가 내린다, 산티아고 순례길
첫날부터 비가 내린다
쫄았다.
아침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사람들은 벌써 일치감치 저 멀리 사라졌다.
한국에서 등산을 조금해서 자신감이 아예 없던건 아니었는데
새삼 사무실 의자에만 앉아 10년을 보낸 세월에
나의 다리는 새처럼 가느다래 진 걸 느꼈다.
무엇보다 10kg 정도되는 배낭이 압박이다.
조금만 언덕을 올랐을 뿐이었는데 숨이 턱턱 막혔다.
비가 오길래 방수자켓을 꺼내려다
배낭을 내동댕이 쳐서 진흙이 잔뜩 묻었다.

하 더디다 더뎌..
배낭을 방수커버로 씌우고 다시 부지런히 걸어갔다.
참 사교성 없는 나 이지만
이 길에서는 모두가 친구가 된다.
모두다 지나가면서 헬로 하이 하와유를 하면서 가기 때문에
개구리마냥 빗속에서 발버둥 치던 중에
어느덧 동행자가 생겼다.




똑똑하고 예쁜 프랑스 처자들이랑, 먹을거 잘 챙겨줬던 스페인 남부 출신 랄리 까지...
때로는 같이 걷고
때로는 혼자 걷고..
우연히 다른 무리도 만나고
혼자 떨어지기도 하고..
외로우면 무리에 끼어서 저녁도 같이 먹고
혼자 사색하고 싶으면 걸음을 늦게 걸어서 무리와 떨어지고..
모두 각자의 페이스대로 각자의 기분대로
자유롭게 걸었다.

날씨는 하루에도 열두번 바뀌고
습했다가 건조했다가.. 바람이 불었다가 뙤양볕이 내리쬐었다가..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모두들 건강상태가 달라 많은 낙오자들도 생기고
한 걸음 한걸음 날씨와 풍경과 길에 귀를 기울이며 걷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다.

때론 밤하늘 별을 보고
때론 새벽 이슬 냄새를 맡으며 걷고 또 걷고..
걷기 싫어도 걷고
걷기 좋은 기분에도 걷고..

그렇게 걷다 보니
Sandol이라는 알베르게에 오게 되었다.
이곳은 쿠바에서 온 이민자가 운영하는 아주 아주 작은 알베르게 숙소인데
쿠바 사람답게 특유의 낙천성과 음악성으로
사람들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한다.
나도 이기회에 옛다 모르겠다. 몸을 좀 흔들어봤다.
부끄러웠다.
삭제하고 싶은 기억...

Sandol 알베르게
수 많은 숙소 중 Sandol을 특별히 포스팅 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만난 어떤 미국인 아줌마와의 대화 때문이다.
이런저런 고민과 미래 계획등을 주절주절 말하는 나를 오랫동안 가만히 잘 들어주더니
몇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마지막으로는 "trust your decision " 이라고 해줬는데
그때는 흘겨들었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그 문장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