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담배향이 풍기는 듯한 베오그라드, 세르비아

아론의 아버지 팔리가 멀리 세르비아에서 헝가리까지 차를 몰고 오셨다.
한 신문사의 카투니스트인 팔리는 입담이 있고
위트가 있는 멋쟁이 이미지였다.
그래서 아론과 에밀리양, 팔리와 함께 프랑스산 고물차를 타고
여행길을 시작했다.



크로아시아로 국경을 넘을 때 아론의 니콘 D50때문에
검사관이 뭐라고 쏘아붙이니
팔리가 30유로를 그의 주머니에 찔러주었다.
크로아시아 세르비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등등의 나라는
옛 유고 연방에서 따로따로 독립해온 나라로서
명목상 사회주의는 지나갔지만 에밀리양은 아직도 그들의 생각속에,
사회틀속에 여전히 사회주의가 진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그래서 세르비아의 주유소 직원은 8시 퇴근 시간 십분전에
이미 가게 문을 잠그기 바쁘고
베오그라드의 맥도날드의 화장실은
가게를 이용하는 고객에게만 제공이 된다.


한국에서 종종 세르비아에 대한 뉴스를 접할 때면
그것은 언제나 크고 작은 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나는 크로아시아의 한 도시에서 세르비아와 크로아시아의 갈등이
실제 였음을 건물곳곳에 박힌 총알자국과 폭탄으로 무너진
방송국건물 등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세르비아의 국경에선 'the real guest' 라며
그 지방 국경에선 유례없는 한국인의 입국을 허락해주었다.
달달거리는 차는 무려 8시간을 달려 드디어 아론의 집에 도착했다.
아론의 가족은 금발의 아줌마와 여동생 Agi, 그리고 고양이와 강아지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벽난로가 있는 거실은 정갈했고
선반에 쌓인 신문들, 닳고 닳은 현관바닥, 약간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는
그 집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 집인지를 보여주었다.


아론의 방은 이층 다락방이었는데 대우 평면티비와 고성능 컴퓨터,
작은 미니오디오, 그리고 한 무더기 음반들, 전자기타로 무장된 아지트다.
천장에 작은 유리창을 내서 채광이 좋고 나름 아늑한 맛도 있었다.
정말 다락방 다운 다락방이란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방 침대까지 기념사진을 찍었을 정도..
시내에 갔을 때는 자동차 배기가스 냄새가 도시 전체에 내려앉아 있었다. 건물은 70년대 80년대 이후로 전혀 손을 보지 않은 듯
오래된 시멘트 건물도 많아서 물끄러미 도시전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정말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다뉴브강은 이곳 노비사드에도 흘러
200년전 터키의 침략을 대비해 건설한 포트리스가
그 강변 주위를 둘러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에밀리와 아론과 나는 지친줄도 모르고 도착한 당일날 저녁에 그 꼭대기까지 걸어올라갔다.
집에돌아와선 완전 골아떨어졌지만...



아이스크림과 터키식 쿠키도 잊을수없는 명물이다.
이곳은 성경에 나오는 디나리온을 화폐단위로 사용하고 있는데
1디나리온은 포린트의 3.5배정도,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300원에 먹을수 있다는 것은
아직 이땅에 남아있는 몇 안되는 축복이었다.
그 아이스크림 가게는 네평남짓한 작은 평수에
테이블이 세 개 밖에 없었는데
우리 일행이 아이스크림과 엄청 달콤한 터키식 쿠키를 느긋하게 먹는 동안 다른편 테이블에는 동네꼬마들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왔다갔다.

노비사드는 그래도 유럽이지만 같은 국경 안에 있는 베오그라드는
유럽바깥이었다. 한 나라이면서 한 나라가 아닌 나라,
그 이유는 과거 오스만 -헝가리 대제국의 민족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어쨌건 베오그라드는 발칸반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동네였는데
거리에는 아코디언이 연주되고
커피샵에서는 인도풍의 가요가 흐르고 있었다.
거리에는 집시아이들이 자동차 창문닦이를 하면서 돈을 버는 한편
옷을 차려입은 아줌마들이 우중충한 도시에
어색하게 자리 잡은 카페에서 신문을 읽고있었다.
빈, 부다페스트, 크로아시아, 노비사드를 모두 흐르는 다뉴브 강은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우울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뭐니뭐니 해도 가장 멋진 다뉴브강의 모습은 아론의 동네 옆개울로 흘러든 작은 다뉴브강이었다. 우리가 갔던 그곳은 마침 석양다운 석양이 지고 마을에선 나뭇잎등이 타는 정겨운 연기냄새, 강가에선 달력그림같은 나룻배하며 모든 것이 한데 아지랑이처럼 어울러진 이미지를 던져주던 그 다뉴브강가...

정갈한 거실의 식탁에 걸맞게 세르비아에사는 헝가리인들은
정갈하게 음식을 먹는다.
결코 어지러짐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세로
햄조각, 빵조각, 스프, 닭고기등이 정돈되어 있는것이
참으로 한국의 그 흐드러질 듯한 밥상과는 달랐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같은 신문사에서
문법과 어법이 틀린 것을 가려내는 업을 맡고있다.
영어를 못하셔서 대화는 못했지만
머무는 내내 식사와 간식을 담당해주시고
마지막 떠날때는 샌드위치와 사과, 물병까지 챙겨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실 만큼 다정하신분이라 인상깊었다.
밤 기차를 타는데 팔리와 에밀리, 아론이 모두 마중을 나와
열두시까지 같이 기차를 기다려주었다.
기차역은 각지에서 온 이주자들과 술주정뱅이들도 암울했고
기차역 벽들과 심지어는 기차 차체에도 각종 낙서,
그래피티들이 칠해져있었다.
사회주의가 강했던 곳에는 이처럼 낙서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결국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기차는 15분 연착해서 도착했고
우리는 힘찬 빠이빠이와 함께 헤어졌다.

기차안은 한국의 기차와는 다르게 쿠페라고 해서
각각 방이 따로따로 나뉘어져있었다. 한 방에 여섯좌석이 있는데
내가 탄 곳에는 마침 아무도 없어 옳거니 누워가자 하며 좋아하고 있을 찰나, 호주 배낭여행객 두명이 불숙 들어왔다.
이 젊은 남녀는 마케도니아 아버지와
호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었다.
이 커플은 마케도니아에있는 삼촌을 방문할겸 배낭여행을 하는거라는데
지금껏 무려 4개월을 여행하고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로마 독일 세르비아 등등을 여행 했다고 한다.
더욱 놀란건 벌써 소비한 돈이 2천만원이라는 것, 내가 2백만원이 아니냐고 거듭물어봤지만 그 남자는 20 thousand 라며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더불어 이제껏 사진은 한장도 안 찍었단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하며 기록을 남기는 순간, 여행은 자신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여행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나름 여행철학을 말해주었다.
호주가 이제는 그리워 부다페스트를 마지막으로
돌아간다는 이 커플이 참 건강해보였다.
불만 꺼지면 뽀뽀를 서슴치않는 모습에서도 그러했지만,
나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매너를 갖추며
자신의 꿈이며 세계정치며 이것저것 말해주고,
또한 전혀 민족주의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개인주의적이지도 않은
중립적인 호주인다운 모습으로,
한 밤을 꼴딱 새는 기차안에서도 터키 커피와 보드게임,
무설탕 딸기 캔디로도 우렁차게 밤을 지새우며
여행을 즐기는 이런 여러 모습들로부터 풍기는 그들의 건강함에
살짝 질투가 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아침 6시에 도착했다.
호주인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혼자 다시 떨어지고 나니
새벽 어둠이 깔린 플랫폼이었다.
부족한 수면을, 지하철 의자에서 조금,
느릿느릿 작동하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조금,
그리고 국립공원 벤치에서 조금많이,
맥도날드에서 조금,, 조금 조금씩 보충을 했다.
또 다시 페치로 오는 기차를 타야한다는 생각에 마구 헛구역질이 났다.
사람들 말로는 추워야하는 10월 말 날씨이지만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했다고 한다.
이제 몇시간후면 집에서 부족한 잠을 몰아 잘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졸음이 마구마구 몰려왔다.
기차안에서 바라보니 하늘에도 하얀 비행기 기찻길들이
마구마구 늘어져있었다.
그러나 내가 타고있던 기차,
정확한 시간에 반듯하게 놓인 철길을 따라 달리고있던
그 기차의 정직함이
나는 더 믿음직스러운 여행이였다.